먹고 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어서

🔖 go places

문을 나서는 순간, 모험이 시작되니까요.

내 앞에 있는 큰 문이 닫혀 있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하지만 찬찬히 찾아보니 작은 문들은 열려 있었고, 그 문은 생각보다 다양한 장소로 통했고, 부엌 싱크대와 작업실 책상에서 만나지 못했던 다채로운 풍경과 사색의 가능성을 선물했다. 그래서 어디가 되었든 올해는 집과 작업실에 있는 동네를 몰래몰래 벗어나 보리라, 다른 지붕과 다른 나무와 다른 얼굴을 보고 오리라 다짐한다. (...) 그리고 go places의 뜻처럼 사비를 들여서가 아니라, 가족이 움직여서가 아니라, 재능이나 커리어 덕분에 언젠가 ‘이곳에 초대받게 될 줄은, 이런 곳에 오게 될 줄은 몰랐어’ 하는 생각하게 될 순간이 오길 조심스레 기대한다. 아직 상상까지 포기하진 않았다.

*그리고 번역한 책의 북토크와 라디오 방송 게스트 출연을 했다는 후기. <이 두 장소는 오로지 내 직업 덕분에 가게 된 것이다.>

🔖 reminiscence

*이전에 일하곤 했던, 이제는 멋진 카페로 변한 도서관 로비에 대해

이 공간에 또다른 나를 심을 수 있을까. 검토서의 분량을 늘리고 다음 일이 들어올까 걱정하며 번역하던 나는 아닐 것 같았다. 난 그때와 달라졌고 달라지고 싶다. 자꾸 움츠러들고 피지 못한 봉어리같이 느껴졌던 그 시절의 나는 누구도 눈여겨봐주지 않던 그 쓸쓸하고 적막했던 로비와 어울렸다.

그리고 그건 그것대로 아름다웠다.

🔖 day to day

그러니 번역은 이제 그저 반복적인 하루 일과 같다. (...) 만약 내가 번역한 책을 전부 기억하거나 내 것으로 만들었다면 나는 아마 모르는 명품이 없는 패션 전문가, 프랑스 여행 박사, 자기계발의 여왕, 페미니즘 강사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박학다식한 사람 근처에도 못 가고, 최근의 내 관심사만 겨우 말할 줄 아는 지극히 평범한 지성의 소유자며 특히 요즘에는 친구와 대화하다 수시로 “그거 뭐더라?”, “그 사람 있잖아?”라고 팔을 휘젓는 설단 현상까지 심하게 앓고 있어 내가 번역한 책의 저자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래도 가끔은 나의 수많은 하루 중 어떤 하루나 어떤 순간을 일부러 기억하기 위해서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어떤 번역은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내 안에 영원히 남는다. 오래도록 나를 떠나지 않고 나만의 이미지가 되고 문장이 되고 내 인생의 일부가 된다. (...) 어떤 화가의 작품을 뉴욕이나 파리의 미술관에서 직접 본 그림보다 훨씬 더 친밀하게 느끼기도 한다. (적어도 내 마음속에선) ‘저건 나의 그림이야, 나의 작가야, 나의 도시야’하고 속삭인다. 가보지 못한 도시를 가본 것처럼 그리워하고 만나보지 못한 사람을 한때 사랑했던 친구처럼 여긴다.

🔖 embarrass myself

그런데도 왜 나보다 좋은 책을 번역하는 사람들과 자기 책을 내는 사람들에 대한 맹렬한 질투심이 가시질 않지? 왜 이 욕망은 없어지질 않지? 왜 이 욕망 때문에 스스로 망신을 자초하고 있지? 왜 자꾸 비참해지고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이 감정은 언제쯤 사라지고 그저 그런 책이라도 꾸준히 하는 번역가로만 만족할 수 있을까.

(...)

포기하려 해도 포기가 잘 안 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머리가 희끗희끗해져서도, 지방에서 올라와서도 소설 쓰기 수업을 들으면서 자기보다 한참 어린 선생과 대학생들에게 비판을 받고 또다시 망신을 당한다. 그러면서도 신춘문예에 도전하고 자비출판을 알아본다. 그것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컸던 시절 더 밀어붙이지 못하고 당장의 생활에 안주한 대가임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그런데 바로 그 ‘간절함’, ‘포기 안 됨’이 재능일 수도 있다. (...) 나 역시 나를 표현하고픈 욕구는 나이가 들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직감이 왔고 한 살이라도 젊을 때 ‘embarrass myself’를 계속해보자 싶었다. 여전히 재능을 의심하고 여전히 맷집 따위 없지만 어차피 아무리 팡팡 때리고 눌러도 고개를 드는 두더지 게임의 두더지 같은 것이 나의 욕망이라면 계속 시험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들어오는 책은 마다하지 않고 번역했고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런 매체에서 의뢰가 들어오지 않고 아무도 좋은 말을 해주지 않는 아무리 못난 글이라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글을 썼다. 소설 출판 거절 편지를 100장쯤 모아두었다는 작가를 떠올리면서 앞으로 거부 메일을 20번은 더 받아도 끄떡없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도 했다.

🔖 weakness and strength

*<에밀리의 병원 24시>의 마지막 내레이션

It's hard trying not to judge yourself. Because we are aware of every mistake. We know our inner doubts, our hidden motivations, our failings. So my wish for next year is to be easier on myself. Focus less on the bad and more on the good. Really, just give myself a break.

🔖 vulnerable

이제는 내가 언제 사랑에 빠지는지, 내가 사랑받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안다. 내 사람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약한 면을 내보이는 것. 어차피 그 사람도 나처럼 약하고 부족한 사람일 테니까. 브레네 브라운의 말처럼 ‘취약함’이 우리를 아름답게 하니까.